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봉오동 전투(영화)/고증 (문단 편집) === [[일본 육군]] === * 첫 장면부터 고증오류로 시작한다. 일본군이 개발하기 이전의 시점에서 [[막대형 수류탄]]이 나온다. * 국경 경비를 검정색 병과장을 단 [[육군]] [[일본 제국 육군/헌병|헌병]]들이 하고 있는데, 당시엔 국경 경비는 [[일본 제국 경찰|경찰]] 소관이었고, 봉오동 전투의 전초전인 국경 초소 습격 사건도 [[경찰]] 초소를 공격한 것이었다. 영화 [[암살(2015)|암살]]에서도 나온 오류로 [[포로]]로 잡힌 헌병이 [[일병|일등졸]]이다. 헌병은 [[상병|상등졸]] 계급의 근무 태도가 좋은 육군 병사들 중에서 골라 뽑는 식이었기에 최하가 상등졸이었다. 그리고 헌병은 승마 병과로 분류되어 [[각반]]이 아닌 [[기병]]용 [[가죽]][[부츠|장화]]를 신었다. [[포병]]의 병과장이 노란색으로 고증은 잘되어있으나 [[보병]]도 포병도 모두 병과장에 소속연대 표시가 없다. 거기에다 그냥 말 타고 다닐 뿐 같은 보병일 승마한 장교들 일부가 뜬금없이 녹색의 기병 병과 표지를 달고 다닌다. * 야스카와 [[소령|소좌]]가 [[호랑이]] 몇 마리를 잡아 가둬 가지고 있다. 이미 저 시절에는 호랑이 구경하기 어려울 때라 조선주둔군 사령관도 아닌 일개 소좌가 그 귀한 호랑이를 난도질하는 건... [[김석원]] [[장군]]이 일본 육군 소좌 시절 [[경성부]]에서 [[고등학생]]들에게 뺨을 맞은 적이 있을 정도로(물론 김석원 장군이 대인배라 크게 처벌 안 받고 그냥 넘어간 일화가 있다.) [*다만 그 당시는 고등학교 진학률이 미친듯이 낮아서 고등학생들 또한 지금과 똑같이 생각하면 안된다.]소좌가 지금도 그렇지만 저 시대에도 막나갈 수 있을 정도의 높은 자리는 아니다. * 월강추격대 지휘관인 육군 [[중위]]가 독립군 군자금을 모집하는 아지트를 급습하며 뜬금없이 [[일본 해군]]의 [[군가]]인 [[군함행진곡]]을 휘파람으로 분다.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수준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아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단순히 추격대장의 개인 취향으로 보기엔 상당히 이질적인 장면이다. * 일본 육군이 [[조명탄]]을 마구 쓴다. 일본군에 조명탄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실제로는 [[해군]] 말고 육군에선 거의 사용한 사례가 없다. 당시엔 단가도 비싸서 함부로 쓰던 물건이 아니었다. 실제로 태평양 전쟁때에도 일본 육군은 조명탄이나 예광탄이 부족해 야간전에서 충분한 화력을 투사하지 못했고 미군의 기록에서도 일본 육군의 조명탄이나 예광탄 사용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기도 하다. 감독이 인터뷰에 언급한 역덕으로 추정되는 다음의 전쟁사 블로거인 봉달이가 봉오동 촬영이 시작되기 전 두 차례에 거쳐 영화제작사로부터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 관련된 질문들을 문의받았다며 글을 게시하였는데, 그 중 봉오동 전투 당시 일본군의 조명탄 사용 여부에 대한 답변으로 1차 대전 종전 직후 영국으로부터 운용 평가를 위해 소수 도입한 게 전부였던 지라 실제로 조선주둔군에게 지급되었을 몫은 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밝혔다. 만일 당사자가 맞다면 감독이 고증 자문을 받았으나 이를 씹은 것이다.[* 나중에 고증 관련 논란 때 인터뷰에서 역덕에게 검증 받았다고 밝혔다(...).] * 일본 육군이 [[산포]]를 사용하는 모습도 나오는데, 봉오동 전투 당시 일본군에는 기관총 부대는 확실히 존재했지만 포병부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영화에서 일본군들이 독립군들을 향해 산포와 야포를 쏴갈기는 모습은 명백한 고증오류이다. [[https://blog.naver.com/minsu977/221571991123|참고]]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기관총만으론 유리한 고지에 은폐한 독립군들을 쉽게 물리칠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깨닫고 후에 [[청산리 전투]]에서는 산포, [[야포]] 등을 동원했다. * 영화 3차 예고편[[https://www.youtube.com/watch?time_continue=6&v=G1T4fiq40js|#]] 7초에 일본군 규모를 가리켜 "어림잡아 오백 정도 되는데 대가리수가 계속 늘고 있어"라고 하는데 [[중국]] 측 인물인 왕청현 5구 순방분소장 서육린이 일본군의 뒤를 추적해서 조사한 보고서에 따르면 (위의 박창욱 교수 논문 참고) "당시 출동한 일본군은 신미중위가 거느리는 17명의 남양수비대와 야스가와 소좌가 영솔한 보병 1개 중대 기관총 소대, 도합 軍隊 200명, 경관 10명, 헌병 8명이다"(전투 당사 집단은 "야스가와 소좌가 영솔한 130여 명의 隊伍")이다. 관객을 향한 [[서술 트릭]]이 아니면 확실히 과장이다. * [[https://scontent-icn1-1.xx.fbcdn.net/v/t1.0-9/67906909_2189241814701065_5760101591239622656_o.jpg?_nc_cat=102&_nc_eui2=AeES6UsnlA2HNzDCWpRS1e38jc26-fdlvSXo_u76BypRhLUcqrrHzkhMfaZbVO1B_ld2iVWWXOpKsXGm-TF7QC82fx7U7CEldGbMilGdBkMvGw&_nc_oc=AQmndJGSj0GYStkU_lZNOYzlXh7hOYqwtZrSNYJyVzh2O8H-lsSAhgZSDDidujREEVM&_nc_ht=scontent-icn1-1.xx&oh=8bd5176215c648cdc664e1dd0af3a942&oe=5DCE755D|스크린샷]]을 보면, 일본 육군 [[정모(의복)|정모]]에 쓰인 턱끈 [[단추]]가, [[대한민국]]의 [[근무복]] 납품 업체가 파는 [[태극]] 문양 들어간 사제 정모용 [[http://myuniform.co.kr/shop/goods/goods_view.php?goodsno=1871&category=005003|단추]]다. * 육군이 [[일장기]]를 들고 행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일장기는 [[일본 제국]]의 국기였다. 당시 일본 육군이 군기로 사용했던 깃발은 붉은 원이 중앙에 위치한 [[욱일기]]였다. * 일본군의 두발 상태가 고증에 맞지 않다. 당시 일본 육군은 사병은 전부 삭발, 장교도 눈치껏 짬 좀 차야 약간 기르는 정도였는데, 유키오같이 기른 머리는 당시 육군에선 [[장군]]도 하기 힘든 수준이다. 야스카와 소좌 정도만 해당 신분에 어울릴 두발을 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